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북 9성 (문단 편집) ==== 함경남도 일대설(함흥 ~ 길주 일대설) ==== >동북9성 길주 이남설은 한백겸에 의해 작성된 『동국지리지』 (1615년)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 「동계」조에서 9성의 설치 범위는 홍원(洪原)부터 이성(利城) 사이이며, 선춘령은 마천–마운령 사이로 보았다. 입비처(立碑處)는 마운령에 있는 것이라 하고, 윤관비는 마운령 위의 석추구기(石樞舊基)로 보았다. 한백겸은 동북9성이 길주 이남에 있다고 주장했다. >----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 연구 中, 이인철 경복대 교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2017, vol.23, pp. 247-292 (46 pages)〉 함흥 평야설과 두만강 이북 700리설의 절충설 정도된다. 이 경우 6세기에 [[신라]] [[진흥왕]]이 북진했다가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상실한 범위[* 함흥 평야부터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마운령]] 이북까지 해안선을 따라 길게 진출한 범위이다.]와 비슷해진다. 조선 중-후기 한백겸,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주장한 이설로 9성의 위치가 [[길주]] 내지 [[마운령]] 이남부터 정평까지 주로 함남 일대에 9성이 위치했다는 주장이다. 고려 측에서 반환을 주장할 때 내세운 근거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함경 산맥 남쪽에 해안을 따라 9성이 일렬로 위치해 있다면 방어선이 지나치게 넓어지는데 반해 교통로가 취약해진다. 중간에 한 곳만 끊어져도 9성 전체의 교통 단절로 이어지고, 이럴 경우 9성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다. 상호 연계를 통해 방어선을 짤 수 있는 서희의 강동 6주와는 상황이 다르다. 특히 [[갈라수 전투]]는 길주로 구원을 가던 [[오연총]]의 군대가 공험진에서 여진군과 맞닥뜨려 싸웠으나 시원하게 말아먹은 전투인데, 이 역시 남쪽에서 길주로 가던 길목에 공험진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공험진이 너무 북쪽에 있으면 고려군의 기동이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전쟁과 역사]]의 저자로 국내에서 전쟁사 관련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임용한]] 교수가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